1부: 이슬람 세밀화 속에 스며든 문학, 여성, 그리고 사랑

그림 ‘정원에서의 연회’, 피르도우시의 샤나메, 티무르제국, 15세기

중국 그림인 듯, 인도 그림인 듯 혹은 고구려 고분 벽화인 듯 왠지 낯설지 않은 이 그림, 어디선가 많이 보았다. 필사본 안에 작은 크기의 사람들과 동물들, 꽃과 나무들이 앙증맞게 그려진 이 그림은 이슬람의 회화 예술의 정수인 이슬람 세밀화(細密畵)다. 세밀화는 이슬람 세계의 문학과 역사, 과학기술과 의학까지도 보여주는 이슬람 회화 예술로 특히 문학은 이슬람 세밀화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주제였다.

이슬람 세밀화는 대 셀주크 제국, 티무르 제국, 백양(白羊) 왕조, 흑양(黑羊) 왕조, 사파비 왕조 등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각각 공방을 두고 제작되었다. 세밀화의 주요 주제는 대부분 페르시아 고전 문학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피르도우시(Firdawsī, 935~1020)와 니자미 간자비(Niẓami Ganjavī, 1141~1209)의 『샤나메』와 『함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세월을 거치며 다양한 예술가가 같은 이야기를 주제로 마치 한 명이 그린 듯 세밀화의 전통성을 따르며 동일한 구성과 양식을 이어왔다.

호스로우와 쉬린

니자미 간자비의 『함세(Khamse)』 5부작 중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호스로우와 왕비 쉬린을 향한 아름다운 청년 펠하드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도 이슬람권에서 사랑받는 설화 중 하나다. 호스로우는 어느 날 절친한 친구이자 화가인 샤푸르로부터 아름다운 아르메니아의 공주 쉬린에 대해 듣게된다. 곧 쉬린에게 사랑을 느낀 호스로우를 위해 샤푸르는 아르메니아로 가 쉬린에게 그의 초상화를 전달한다. 쉬린도 호스로우에게 사랑을 느껴 그를 찾아가지만, 제국들간의 이해관계와 쉬린을 사모하는 새로운 연적 펠하드의 등장 등으로 그들의 사랑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호스로우는 펠하드에게 거짓으로 쉬린의 죽음을 고하고 슬픔에 휩싸인 펠하드는 끝내 자살한다. 여러 사건들을 겪은 후 호스로우와 쉬린은 결혼을 앞두지만 호스로우는 살해당하고 쉬린은 자살한다. 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속의 여주인공 쉬린은 세밀화에서 때로 호스로우와 함께, 때로는 펠하드와 함께 등장한다. 호스로우와 쉬린, 펠하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인 ‘호스로우와 쉬린’은 사실 펠하드의 깊은 연정으로 ‘펠하드와 쉬린’이라는 또 다른 제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문학 필사본의 삽화로 가장 많이 그려졌던 세밀화 주제 중 하나인 ‘쉬린의 목욕’에서 목욕중인 쉬린은 항시 상의는 나체로 하의는 넓은 파란 속바지를 입고 있다. 쉬린은 말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호스로우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물가에 앉아 머리를 빗으로 빗고 있다. 이 세밀화에서 쉬린은 하의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최대한 여성의 노출을 감추고 있다. 마치 노출을 허용하지 않는 이슬람 회화의 보수적인 면과 화가의 상상력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보여주고 있는 듯 독자에게도 묘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마치 조선시대 신윤복의 그림을 떠오르는 건 억지일까?

그림 ‘쉬린의 목욕’, 니자미의 함세, 15세기 (티무르 제국)

레일라와 마즈눈

쉬린과 함께 세밀화의 여주인공으로 빈번히 등장하는 또 다른 여주인공은 레일라이다. 오늘날 중동식 로미오와 줄리엣으로도 불리는 레일라와 마즈눈의 사랑 이야기는 터키와 이란 등지의 무슬림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끈 사랑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레일라와 마즈눈은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게된다.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해야 하는 레일라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마즈눈은 미치광이처럼 홀로 세상을 떠돌게되고, 레일라 역시 사랑하는 연인과 남편에 대한 충절 사이의 괴로움에 휩싸여 살게 된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죽게 된다는 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세밀화에는 사랑에 괴로워하며 미쳐버린 마즈눈(마즈눈의 이름은 아랍어로 ‘미친 사람’이라는 뜻임)과 레일라의 애절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마즈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레일라가 우는 장면 역시 세밀화의 주제로 자주 그려졌으며, 오랜만에 만난 이 두 연인이 서로를 알아보고 기쁨과 놀라움 등의 감정에 사무쳐 사막에서 그대로 기절한 장면은 ‘레일라와 마즈눈’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로 각 국가에서 세밀화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났다. 아래 그림 3, 4가 바로 ‘레일라와 마즈눈의 기절’을 그린 세밀화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방황하는 마즈눈의 애절한 모습은 그림 3에 더 잘 드러나있다. 기절한 그들을 위해 장미수를 뿌리는 터번을 쓴 남자와 텐트 뒤에서 처량한 두 연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물과 동물들의 모습이 비극적인 사랑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림 ‘레일라와 마즈눈의 기절’ 15세기 초반 (백양 왕조)

그림 ‘레일라와 마즈눈의 기절’
15세기 후반 (티무르 제국)

터키 미마르시난 국립 예술 대학교에서 '아시아 터키 지역의 세밀화 속 여성상'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요 연구분야로 이슬람의 세밀화와 비잔틴 제국의 이콘 등 종교 회화인 성화(聖畫)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문화재복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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